AI로 쓴 소설은 가짜인가, 못 쓴 소설이 문제인가
‘AI로 썼다’는 말만으로 웹소설의 수준을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작품에서 무엇이 잘됐고 부족한지, 사람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그 과정에서 지켜야 할 권리와 약속을 지켰는지까지 봐야 합니다.
한 번에 문장을 많이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 달라진 조건입니다. 하지만 만드는 속도와 읽을 가치는 같은 항목이 아닙니다. 오래 썼다는 이유만으로 지루한 장면이 재미있어지지는 않습니다. 빨리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잘 설계된 복선이 사라지지도 않고요.

사진과 축음기, 그리고 기계를 부쉈던 노동자의 역사를 꺼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새 도구가 등장할 때 한꺼번에 섞이는 질문을 나누어 보면, AI 웹소설을 둘러싼 논쟁도 훨씬 정확해집니다.
1. 작품의 문제를 실제 문장과 장면으로 설명할 수 있나
‘AI 냄새가 난다’는 인상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봅시다. 인물의 말투가 모두 같은가요? 갈등이 생기자마자 우연으로 해결되나요? 앞에서 정한 세계의 규칙을 뒤에서 깨뜨리나요?
이렇게 물으면 고칠 곳이 보입니다. 독자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고, 작가는 무엇을 다시 써야 할지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직접 쓴 원고에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는 기준입니다.
반대로 ‘AI를 썼으니 작품이 아니다’에서 판단을 끝내면, 잘된 부분과 실패한 부분을 구별할 기회를 버립니다. 도구 이름이 비평을 대신하는 순간입니다.
사진의 등장을 설명할 때 자주 인용되는 일화가 있습니다. 화가 폴 들라로슈가 1839년 사진을 보고 ‘회화는 죽었다’고 말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스미스소니언은 이 발언의 진위를 확인할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 멋진 일화라는 이유로 확정된 역사처럼 쓰면 곤란합니다. 스미스소니언의 설명
이 일화가 사실이어야만 논지가 성립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진 한 장을 평가할 때 촬영 버튼을 누르는 데 몇 초 걸렸는지만 따지는 기준은 빈약합니다. 무엇을 담았는지, 어디에 섰는지, 어떤 순간을 골랐는지를 함께 보니까요. AI로 문장을 만든 작품에도 그 정도의 구체적인 질문은 필요합니다.
2. 사람은 무엇을 결정했고, 무엇을 확인했나
다음은 차이를 설명하기 위한 가상 사례입니다.
- A는 AI에 장르와 분량만 알려주고 나온 원고를 확인 없이 올립니다.
- B는 인물의 욕망과 결말을 정하고 여러 장면을 제안받습니다. 맞지 않는 장면을 버리고, 대사를 고치고, 앞뒤 설정을 대조한 뒤 원고를 완성합니다.
둘 다 AI를 썼습니다. 그러나 ‘AI 사용’이라는 표시 하나로는 두 사람의 작업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B의 작품이 반드시 재미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과정에 대한 평가와 완성된 작품에 대한 평가는 각각 해야 합니다.

AI 초안을 그대로 공개하는 경우와 선택·수정·검증하는 경우를 나눈 가상 비교입니다. AI 생성 이미지이며, 오른쪽 과정이 작품의 품질을 보장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은 입력한 명령문의 길이가 아닙니다. 왜 그 장면을 남겼는지, 어떤 제안을 거절했는지, 독자가 오류를 짚었을 때 설명하고 고칠 수 있는지입니다. 도구를 썼다는 이유로 이 책임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1906년 6월 6일 미국 의회 청문회에서 작곡가 존 필립 수자는 기계음악이 사람들이 직접 노래하는 일을 줄일 것이라고 걱정했습니다. 성대가 진화 과정의 꼬리처럼 사라질 수 있다는 과장된 비유까지 썼고, 기록에는 웃음이 표시돼 있습니다. 이 발언을 진지한 생물학 예측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직접 해보는 능력과 습관이 약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핵심입니다. 1906년 청문회 기록, 24쪽
AI를 쓰는 작가에게도 적용할 만한 질문입니다. 장면의 문제를 찾아내는 눈까지 전부 맡기면, 결과물을 고를 기준은 어디서 얻을까요? 생성은 도구에 맡길 수 있어도 자기 작품을 읽는 일까지 포기해서는 곤란합니다.
3. 누구의 권리와 어떤 약속이 걸려 있나
1811년 노팅엄셔에서 시작된 러다이트 운동을 ‘새 기계가 무서워서 부순 사람들’로만 설명하면 중요한 부분이 빠집니다. 영국 국립문서보관소가 제시한 자료에는 임금 삭감, 숙련노동의 가치 하락, 고용 위협이 등장합니다. 지역에 따라 구체적인 불만도 달랐습니다. 영국 국립문서보관소의 러다이트 자료
이 점은 AI를 옹호하는 쪽에서도 피하면 안 됩니다. 창작의 문턱이 낮아진다는 장점만으로 원작자의 권리, 보상, 일자리 문제에 답한 셈 칠 수는 없습니다. AI를 비판하는 사람을 모두 ‘현대판 러다이트’라고 부르면 그들이 실제로 제기한 쟁점을 놓칩니다.
작가는 사용한 자료와 표현의 출처를 확인하고, 특정 작품을 과도하게 따라간 부분이 없는지 검토해야 합니다. 공모전에 낸다면 그 공모전의 현재 AI 이용 규정을 확인해야 하고, 독자에게 밝힌 제작 방식과 실제 작업도 맞아야 합니다. 이것은 모든 AI 이용을 한꺼번에 불법이라고 판정하는 기준이 아니라, 개별 작업을 책임 있게 공개하기 위한 확인입니다.
수자의 후일담도 단순한 승리담으로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1925년 업계지에는 그가 신형 축음기의 재생음을 듣고 “That is the very soul of music”이라고 감탄했다는 보도가 실렸습니다. 다만 제조사 판매 담당자가 대리점에 보낸 편지를 옮긴 기사입니다. 재생음에 대한 찬사를 모든 우려를 철회한 선언으로 확대할 수는 없습니다. 1925년 10월 15일 《Talking Machine World》, 76쪽
미국 의회도서관이 소개한 편지들을 보면 수자는 그 이전에도 녹음 계약을 맺었고, 작곡가가 보상받는 문제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기술을 이용하면서 그 조건을 비판하는 태도는 함께 존재할 수 있습니다. 미국 의회도서관의 수자 서신 해설
‘딸깍’ 다음에 남길 문장
AI 웹소설을 읽고 문제가 느껴졌다면 한 장면을 골라 설명해보면 됩니다. 인물의 행동이 납득되지 않는지, 이전 설정과 충돌하는지, 다른 작품의 구체적인 표현을 반복하는지요. 작가라면 같은 장면에서 자신이 선택하고 고친 이유를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비판은 작품을 나아지게 합니다. ‘AI를 썼다’는 사실 하나로 작가의 자격을 끝내버리는 말보다 훨씬 엄격합니다. 창작의 문턱은 낮아질 수 있습니다. 공개하는 작품의 기준까지 낮출 이유는 없습니다.